아시안오즈와 시오디에이전시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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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는 시스템, 네트워크, DBMS, 보안 및 통합유지보수를 전문으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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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부문 인원 내용
영업부문 0명
  • 시스템, 스토리지, 네트워크 관련 영업 경력 만 1년 이상자.
엔지니어 0명
  • 유닉스 시스템, 스토리지 하드웨어 관련 경력 만 1년 이상자.
  • DB관련, 보안 관련 기술지원 경력 만 1년 이상자.
  • 네트워크 설치 및 유지보수 경력 만 1년 이상자.
관리부문 0명
  • 마케팅, 경영지원 관련 신입 또는 경력.
지원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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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사지원서(Application Form) 작성 후 On-line 제출 (liy@bminfotech.co.kr)
  • 1차 서류심사 통과 후 면접일 개별 통보
  • 2차 면접 실시 (경우에 따라 추가 면접이 있을 수 있습니다.)
  • 3차 건강검진 및 결격여부 판정
  • 최종 합격 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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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0 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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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수난예고ἐν τῇ ὁδῷ(길에서)라는 표현은 이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반복 될수록 그 의미는 점점 커져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맨 마지막에서 이 표현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단락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예고를 하신 장면입니다.(8:30-32, 9:30-32) 앞에 있었던 수난예고와 비교해 본다면 십자가 사건에 대한 묘사가 더 구체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방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마 여기에서 '이방 사람들'은 로마 군대, 더나아가 빌라도 총독을 의미할 것입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8:31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ολλὰ παθεῖν καὶ ἀποδοκιμασθῆναι ὑπὸ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καὶ τῶν ἀρχιερέων καὶ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καὶ ἀποκτανθῆναι καὶ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ῆναι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두 번째 수난예고9:31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αραδίδοται εἰς χεῖρας ἀνθρώπων, καὶ ἀποκτενοῦσιν αὐτόν, καὶ ἀποκτανθεὶς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ήσεται.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세 번째 수난예고10:33-3433 ὅτι Ἰδοὺ ἀναβαίνομεν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καὶ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αραδοθήσεται τοῖς ἀρχιερεῦσιν καὶ τοῖς γραμματεῦσιν, καὶ κατακρινοῦσιν αὐτὸν θανάτῳ καὶ παραδώσουσιν αὐτὸν τοῖς ἔθνεσιν 34 καὶ ἐμπαίξουσιν αὐτῷ καὶ ἐμπτύσουσιν αὐτῷ καὶ μαστιγώσουσιν αὐτὸν καὶ ἀποκτενοῦσιν, καὶ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ήσεται.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34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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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하지만 이 단락에서 저의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앞장 서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놀랐으며,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32절 중) 입니다. 예수님은 왜 앞장 서서 가시는지, 제자들은 왜 놀랐는지,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왜 두려워했는지에 대해서 마가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건강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에반스의 설명을 참고하셔서 상상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서 가시는 것은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위험을 맞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크랜필드(Cranfield, 335)는 이러한 묘사는 마가복음이 쓰여진 시기에 예수와 비슷하게 두려움과 불확실한 미래를 겪고 있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WBC 마가복음(하)」, 260)​​2) 불쌍한 두 제자아마 본문을 읽으면서 감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여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세 번씩이나 수난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예수님께서 좀 더 아끼셨던 것처럼 보였던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이 자리 욕심을 낸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우리가 마가복음이 시간순서대로 기록되었다는 전제로 본다면 이런 비난은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마가복음이 시간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마가는 마가복음 안에서 사건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시간의 흐름은 아닙니다. (1)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으로 이해하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유월절이 네 차례로서 그 사이의 3년이라는 시간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마치 유월절이 한 번인 것과 같은 인상을 같게 합니다. (2) 다른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지리적으로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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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지역과 유다 지역을 왔다갔다 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반면 마가복음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유다 지역으로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3) 대체로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인데,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그룹으로 묶어서 서술합니다. 마가복음 안에서 볼때 예수님의 이적 사건들은 대체로 제1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2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와같은 점들은 마가복음의 경우 사건의 흐름은 있지만, 그것이 시간의 순서대로 구성되었다고는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의 수난예고가 일정한 패턴을 보이면서 사이사이에 일정한 주제를 가진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신 직후에는 제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첫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일'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는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을 한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는 '철없어 보이는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자리 욕심을 내는 일'이 기록됩니다. 아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딱들어 맞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실제로 이런 행동을 했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마가복음이 세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 이것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야고보와 요한을 '철없다'고 욕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일정부분 마가복음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 대목에서 철없어 보이는 이 제자들을 욕하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제자들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미안하지만)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려 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언급해야 할 부분이지만, 이렇게 제자들을 '철없어'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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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줘도 '모르는'이들로 마가복음이 그리고 있는 이유는, 아무리 예수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제자들조차도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알 수 없었다는 메세지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들은 제자들을 마가와 같이 그리지 않습니다.) 어찌하다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잠시 제자들의 대변인이 되었네요. 넘어가겠습니다. ​3) 자리 싸움이 사건이 현재의 문맥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사건에만 집중해 보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두 제자의 행동에 대해서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단체로 항의합니다. 두 제자와 열 명의 제자들은 왜 이렇게 싸울까요? ​먼저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반스는 이런 설명을 합니다. 마가복음 밖에서(즉, Q에서) 예수는 장차 열두 제자가 다스리게 될 것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예고를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참조. 눅 22:28-30) 이 말씀은 다니엘서에 대한 예수의 이해에서 생겨난 것이다.(「WBC 마가복음(하)」, 271)​저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점에 착안하여 다른 복음서들과의 비교는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학자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비교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지만, 제가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이 없다고해서 그 당시에 전해지던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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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되는 예수님의 말씀들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Q자료'라고 표기 합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이 Q자료를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Q자료를 몰라서 사용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힘듭니다. 분명한 것은 마가복음에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정 받았던 내용들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에반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구절들을 통해 당시에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의식 하나를 끄집어 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것은 열 두 제자들에게 모두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 높고, 더 중요한 자리는 있기 마련이겠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그 부분에서 약속된 자리 중에서 더 높고 중요한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가 아주 몹쓸 요구는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해야 할 열 명의 제자들 역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구한 이러한 욕심이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프란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42~44절에서 이어지는 비판이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향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마가가 복음서의 이 부분에서 제자들을 일관되게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두 형제의 야망에 대해 불쾌하게 느낀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한 경쟁에서 선수를 쳐 동료들보다 먼저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한 사실에 대해 불쾌해했음을 암시한다.(「NIGTC 마가복음」, 674)​그렇다고 제자들 모두가 잘못했으니 서로 화해하면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래리 허타도의 설명을 빌려 말하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제기한 질문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자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 대망(messianic expectation)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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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지가 드러난다(35-37절). 한편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야심과 우리가 고대 유대교에서 기대한 메시아 통치라고 알고 있는 내용에 일치하는 희망이 함께 드러난다. 다른 한편에서는, 독자가 알기로 이제 곧 예수님의 운명이 될 일과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올바른 역할에 관해 가르치신 내용이 심각하게 불일치하는 꿈이 보인다.(「UBC 마가복음」, 244)​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헬라어로는 그리스도, ὁ Χριστός)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앞서서 당시 유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생각들, 예를 들어 결혼과 이혼에 대한 문제(10:1-12), 아이들에 대한 문제(10:13-16), 부귀에 대한 그들만의 인식(10:17-31)에 대해서 그 틀을 흔들어 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에게 변하지 않은 중요한 한 가지, 그것은 메시아와 관련된 인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분명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지속적(세 차례의 수난예고)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마가복음이 반복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프란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십자가를 통한 승리의 신학을 산출하도록 기대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사용하신 용어 가운데 자신들에게 적합한 것만 붙들고 나머지는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NIGTC 마가복음」, 670)​어쩌면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분명한 만큼 유대인의 사고 속에서 인식되었던 것처럼 메시아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대리자로서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행하리라(「UBC 마가복음」, 252), 그리고 비록 마가복음에서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Q자료)에서 언급된 것처럼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자리가 자신들에게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려는 메시아와는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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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랐습니다! ​본문은 그런 제자들의 메시아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라 봐야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이해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마 마가복음이 끝나는 날에 상세히 설명할 것 같습니다.)​42-44절에서 예수님은 분명 당시의 '권세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리더십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간단한 언급만 한다면 43절에서 '위대하게/크고자'(μέγας)라는 표현은 9:33-37에서 제자들이 싸웠던 '누가 크냐'(τίς μείζων)는 문제로 돌아갑니다. 44절에서 '으뜸'(πρῶτος)이라는 표현은 역시 9:33-37에서 '첫째'(πρῶτος)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예수님의 요청은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에서 '종'(δοῦλος)으로 한층 강화됩니다. [cf. 래리 허타도의 설명을 곁들입니다. '섬기는 자'라는 용어는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교히 직분의 여러 유형을 언급하는 데 쓰이는 단어와 같으며, 사실 신약에서 교회의 지도자와 사역자를 지칭하는 가장 흔한 단어다. ... '종'은 노예 상태인 사람을 가리키는 반면 '섬기는 자'는 누구든지 다른 이들을 위해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기도 하다.(「UBC 마가복음」, 253)]​45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분석은 매우 방대하며 복잡합니다. 더 확인이 필요하신 분은 래리 허타도의 책 246-247, 프란스의 책 676-679, 에반스의 책 275-284를 직접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4) 눈먼 사람을 고치심11장에 나오는 무화과 사건을 제외하면, 이 단락은 마지막 이적입니다. ​여리고라는 지명을 통해 예수님의 여정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던 여정이 끝나갑니다. 그 마지막은 의미심장하게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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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시작점이었던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셨던 것(8:22-26)처럼 이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눈먼 사람을 고치십니다.​특이하게도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정보가 나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ὁ υἱὸς Τιμαίου Βαρτιμαῖος, τυφλὸς προσαίτης)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치료를 받습니다. 벳새다에서는 두 번에 걸쳐 치료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즉시(εὐθὺς)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벳새다에서는 치료 받은 이를 집으로 보내셨지만, 이곳에서 치료받은 이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ἐν τῇ ὁδῷ) 따라갑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프란스는 말합니다. 우리가 접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인물은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부유한 사람이었지만(10:17-22), 제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예수의 수행단에 환영받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으로 용인받는 단계의 정반대 쪽에 있는 사람, 곧 맹인 거지를 만난다. 그리고 예수를 '길에서'따르게 될 자는 부자가 아니라 이 맹인 거지였는데, 그의 시력은 회복된 반면에 부자는 '눈이 먼 채'가버렸다. ... 이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가치의 역전에 대한 예수의 확장된 가르침은 가장 가능성이 적은 제자, 환영받는 '작은 이', 먼저 될 나중 된 자를 모집하는 데서 요약된다.(「NIGTC 마가복음」, 680)​​5) ἐν τῇ ὁδῷ (길에서, 여정)이제 이 여정(ἐν τῇ ὁδῷ)은 끝났습니다. 이 여정에서 제자들은 분명 제자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드러나겠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이해가 가르침의 부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여정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 뿐이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묵상이 되시길 바랍니다^^​​2020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매일성경 본문을 따라서 「마가복음」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부로 그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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